그랑핸드 다움을 표현한 

다섯가지 시그니처


도시와는 달리 낮은 건물들과 그 뒤로 완만하게 펼쳐진 능선, 빠르게 지나쳐 더 아쉬운 좁은 골목들, 차창 틈으로 들어오는 기분 좋은 낯선 공기. 해가 지기 전 이 풍경 속으로 녹아들고 싶은 마음에 숙소로 향하던 차를 갓길에 세우고 느리게 걸어본다. 발길 닿는 곳으로 걷다 도착한 능원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예찬하고 있다. 적당한 크기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찾아 그 아래 자리를 잡는다. 바빴던 일상의 기억은 금세 둔해지고 바람이 닿는 살갗이 기분 좋게 저려온다.
자다 깨 나온 거실에는 느릿하게 점멸하는 트리 아래 나 때문에 잠이 깬 토토가 부스스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카펫에 자리를 잡고 눕자 내 품 안에 들어와 털썩 쓰러진다.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는다. 불 꺼진 벽난로에서는 이따금 틱틱거리는 소리가 난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다 배 위에 멈춘 손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모임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자리를 피해 복도에서 담배를 태운다. 빈방을 찾아 가죽 소파에 파묻히듯 앉는다. 눈을 뜨니 테이블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잔을 건넸고 나는 한 번에 들이킨다.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다시 눈을 뜨니 아침. 대놓고 비웃던 그녀의 낮은 웃음소리는 꽤 근사했다.
비슷한 옷차림과 취향,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대화들. 영화 속 존 말코비치처럼 똑같은 얼굴들로 가득 찬 연회장에서 현기증을 느낄 때쯤, 저 멀리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발견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존재감을 지우려는 듯 더 크게 웃었다. 강한 끌림과 미묘한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등을 돌려 타인과의 의미 없는 대화에 힘겹게 집중했다.
이른 아침부터 한바탕 비에 젖은 공원은 갑자기 나타난 햇살로 숨죽이며 반짝거린다. 한 달에 하루, 이곳에서 함께한 그 사람과의 인연은 그리 길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정해진 날짜에 여기에 오는 것이 나만의 작은 취미가 되었다. 정자에 앉아 바라본 공원은 저 멀리 강 맞은편의 높은 빌딩 숲으로 물러난 비구름과 대비되어 아침인지 노란 해 질 녘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향의 일상화를 위한 

12가지 프라그런스 라인


방금 사온 꽃다발의 포장을 뜯어내 반 정도 물이 담긴 투명한 병에 꽂는다. 꽃 한 다발에서 내어지는 생기가 테이블 주변으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고 다시금 꽃다발에 코를 가까이 댄다. 옅게 깔린 꽃내음 위로 올라오는 상큼함을 나는 느리게 삼켜낸다.
식물원 B관의 입구문을 열자마자 높게 뻗은 열대나무에 시선이 갔다. 열대나무의 맨 위 이파리는 전면 유리로 된 천장과 거리가 얼마 차이 나지 않아 보였고, 그 끝에 시선이 다다르자 목뒤가 뻐근해져 고개를 숙였다. 길 양옆으로는 식물들이 빽빽하게 늘어섰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초록과 어우러진 화려한 색감의 식물들이 뿜어내는 수분기 있는 싱긋한 향이 진해졌다.
서핑보드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어 바다 표면을 흩뜨렸다. 자잘하게 햇빛이 반사되는 물결 사이로 어렴풋한 바닷속을 내려다본다. 방금 들어갔다 나왔는데도 밖에서 보는 바다는 깊이감이 없어 다시금 속이 궁금해진다. 서핑보드에서 내려오자 온몸으로 전해지는 차가움에 짧은 숨을 들이쉬고 바다 아래로 헤엄쳤다.
초대받은 집 앞에 도착하여 숨을 한번 거르고 초인종을 눌렀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렸다. 현관에서 보이는 내부는 예상보다 더한 고급스러움이 느껴져 나는 절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실로 향하면서 지나친 복도는 크고 작은 그림들이 여러 개 걸려있는 것이 전부였다. 복도 끝에는 벽면의 반 이상을 채우는 큰 그림이 세워져있고 그 옆에 스탠드 조명이 그림 전면을 비추었다.
더해지는 더위에 미리 냉동고에 넣어두었던 잔과 자몽을 꺼냈다. 자몽을 반으로 잘라 하나를 들고 힘을 주어 컵 안으로 즙을 떨어트린다. 자몽 즙이 몇 방울씩 얼굴에 튀었지만 닦아내지 않고 바로 남은 자몽 조각을 집어 들어 마저 즙을 짠다. 조금의 탄산수와 얼음도 넣어 몇 번 저어내자 톡 쏘는 소리가 자잘하게 들린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적당한 위치를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다 통로 쪽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구경하다 갑자기 풍기는 옅은 꽃향기에 순간 고개가 돌아간다. 방금 전에 나를 스쳐 지나갔는지 멀지 않은 거리에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적당한 위치를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다 통로 쪽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구경하다 갑자기 풍기는 옅은 꽃향기에 순간 고개가 돌아간다. 방금 전에 나를 스쳐 지나갔는지 멀지 않은 거리에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따금씩 찾아가는 도서관 구석에는 유달리 짙은 고동색 책장이 있다. 낡은 책장에는 그에 어울리는 오래된 서적들이 꽂혀있다. 색이 바랜 책표지로 감싸진 책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권을 골라 펼쳐본다. 종이를 넘길 때마다 맡아지는 옅은 내음이 좋아 나는 다시 책을 덮고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연속으로 넘긴다.
인적 없는 숲 속, 옷 깊숙이 밴 매캐한 장작 타는 냄새, 투박한 외투와 신발, 예리한 연장들, 그리고 이 모든 걸 가지고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 거친 재료들과 위험한 도구들을 다뤄가며 온전히 내 두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의 쾌감은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거나 부자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나이와 직업도 중요치 않은 원초적인 본능의 해소에서 온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 소리에 되려 기분이 가라앉는다. 자신의 미운 부분만 자꾸 생각나 사랑받을 자격을 모두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사랑하고 싶고, 또 받고 싶다. 그리고 그 마음을 숨기며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창 밖에는 이른 아침까지 내리는 맑은 빗물에 꽃잎들이 떨어져 위태롭게 흐르고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불안하지만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갑자기 쌀쌀해진 공기에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내가 보고있다는 걸 모르는지 고양이는 침대 옆에 대충 벗어 둔 구두를 가지고 놀고 있고, 이불에는 새벽까지 켜둔 향초의 잔향이 남아있다. 끌어당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다시 눈을 감으며 오늘은 일찍이 사두었던 트렌치 코트를 입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한 평생 나를 괴롭혔던 도시를 도망치듯 떠나 정착한 이곳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일 년 내내 온화한 날씨, 싼값에 즐기는 훌륭한 과일들, 그을린 피부만큼 밝게 빛나는 사람들의 표정, 언제든지 품으로 뛰어들 수 있는 산과 바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화로운 이 낙원에서 어째서인지 나는 매일 밤 고향의 꿈을 꾼다.

자연의 향을 담은 

내추럴 블렌드 오일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문을 열고 나가니 아직은 새벽 어스름, 지평선에 머무는 햇살이 가늘게 정원을 비추자 온갖 풀과 꽃, 열매의 향을 잔뜩 머금고 있던 이슬이 진한 내음만 남긴 채 반짝이며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인위적이지만 사람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 이 정원은 방치된 듯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집은 하나의 큰 분재 처럼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자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건드릴 수 없는 예민함과 완벽함으로 가득찬 그 공간은 그가 내려준 허브티의 향으로 채워졌고 나는 테이블 위의 작은 분재보다 더 작아져 그의 숲을 거닐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풍경인지 궁금해졌다.